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NHK 교향악단 (문단 편집) === 초기에서 2차대전까지 === 개항 이래 일본에서는 여러 서양 문물들과 함께 [[클래식(음악)|클래식]] 음악도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다만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관현악단은 도쿄음악학교(현 도쿄예술대학 음악학부)의 관현악부나 몇몇 실내악단에 가까운 소규모 기악 [[동아리]] 정도였고 전업 프로 관현악단은 전무한 실정이었다. 이런 까닭에 몇몇 지식인과 음악인들은 일본에도 서양식 관현악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1920년대에는 [[야마다 코사쿠]]가 결성한 도쿄 필하모니회와 일본 교향악 협회를 비롯해 실제로 창단 시도도 몇 차례 있었다. 하지만 음악인들의 기량이나 재정 문제 뿐 아니라, 관현악이라는 편제에 대한 일본인들의 무관심 때문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25년 4월 말에서 5월 초까지 일본 교향악 협회 단원들에 [[소련]]의 탄압을 피해 [[만주]] 지방으로 이주해온 백계 [[러시아]] 음악인들을 추가한 임시 편성의 악단이 '일본-러시아 교류 교향관현악 대연주회'라는 연속 연주회를 개최했는데, 이게 대박을 쳐서 이후 일본인만의 관현악단 설립에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 1926년 1월에 일본 교향악 협회는 본격적인 공연 활동에 들어갔는데, 몇 달 지나지 않아 창립자였던 야마다와 그의 후배였던 [[고노에 히데마로]][*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세 차례 역임한 [[고노에 후미마로]] 공작의 동생이다. 일본 귀족 중에서도 최상류, 성골 중의 성골이었던 고셋케(五攝家)에 속했던 코노에 가문은 [[메이지 유신]] 후 공작가가 되었고 그 중에서도 최고로 꼽혔는데, 히데마로도 자작(子爵) 호칭을 보유하고 있었다.] 둘이서 협회 운영권을 둘러싸고 충돌했고 결국 야마다가 축출되고 고노에가 운영권을 쥐게 되었는데, 코노에는 같은 해 10월에 악단 명칭을 '신교향악단(新交響楽団)'으로 변경함과 동시에 재창단을 선언했다.[* 이 때문에 NHK 교향악단의 창단 연도를 야마다가 일본 교향악 협회를 결성한 1925년이 아닌, 고노에가 명칭 변경과 재창단을 단행한 1926년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물론 초대 상임 지휘자도 고노에 자신이 맡았다. 신교향악단(약칭 신향)은 일종의 시연회 성격이 강한 연구발표 연주회와 본격적인 공연인 정기 연주회, 그리고 라디오 방송 출연 위주로 활동했는데, 1927년부터는 악단의 실력 향상을 위해 [[체코]] 출신의 [[독일]]계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인 요제프 쾨니히를 공동 상임 지휘자로 영입했다. 하지만 쾨니히는 불과 2년 뒤 어느 [[높으신 분]]의 부인과 [[불륜]] 관계가 발각되어 추방당했고, 일러 교류 음악회 때 악단의 악장을 맡았던 러시아 바이올리니스트 겸 지휘자인 니콜라이 시페르블라트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세간의 기대와는 다르게 악단 내부에서는 고노에의 독단적인 면모와 단원들의 저임금에 대한 불만 등으로 자주 갈등이 빚어졌고, 1931년 여름에는 약 10여 명의 단원들이 집단 탈퇴해 '코로나 교향악단(이후 도쿄 방송 관현악단으로 개칭)'이라는 악단을 만드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다만 이 때는 뒷수습을 그럭저럭 한 까닭에 큰 스캔들로 번지지 않았다. 진짜 중요한 스캔들은 1935년 여름에 일어났는데, 잔존 단원들도 고노에와 그의 매니저였던 하라 젠이치로가 악단 재정과 급여 관리를 엉망으로 하고 있다는 것에 빡쳐서 고노에 밑에서는 더 이상 공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렸다. 고노에와 하라는 결국 쫓겨났고, 단원들은 자주 운영 체제를 취할 것을 선언했다.[* 고노에는 해외 활동에 주력하다가 결국 [[독일]]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까지 활동하게 되었다.] 악단 측은 예전에 코노에가 발라버렸던 야마다 코사쿠와도 관계를 회복했고, 재정 확보를 위해 일본 방송 협회(당시 JOAK)와 정기 출연 계약을 체결하면서 방송 연주회 때는 'JOAK 교향악단'이라는 명칭으로 활동했다. 악단 체제 개편과 함께 새로운 지휘자의 물색도 시도했고, 1936년에 [[폴란드]] 출신의 지휘자인 조지프 로젠스톡이 전임 지휘자 직책으로 부임했다. 로젠스톡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스타일의 엄격한 통제로 단원들의 합주력과 집중력을 높이는데 힘썼고, 동시에 특정 작곡가의 작품을 한 시즌에 집중적으로 연주하는 연속 공연과 근현대 음악의 적극적인 소개 등 전면적인 체질 개선을 시도했다. 로젠스톡 밑에서 점차 실력이 향상될 즈음에는 [[중일전쟁]]과 뒤이은 [[태평양 전쟁]]의 영향으로 일본 음악계도 노골적인 [[군국주의]] 찬양과 미화의 광풍에 동참하게 되었는데, 이 즈음 악단 이름을 종전의 '신교향악단'에서 '니혼(일본) 교향악단(日本交響楽団)'으로 바꾸었다. 동시에 로젠스톡 외에 야마다 카즈오와 오타카 히사타다가 정기적으로 객원 출연하기 시작했고, 이 두 지휘자는 이듬해(1942년)에 공동 전임 지휘자로 공식 부임해 삼두 체제로 악단을 이끌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개전 후 로젠스톡은 점차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었는데, 그나마 악단 사무국장이었던 아리마 다이고로를 비롯한 지지파가 나서서 당장 활동 금지 조치를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황이 악화되면서 일본 사회가 전반적으로 동맹국인 독일의 [[반유대주의]] 정책에 호응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유대인]]이었던 로젠스톡의 입지는 계속 악화되었다.[* 당시 일본은 [[베니토 무솔리니]] 집권기의 이탈리아와 함께 반유대주의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추축국 중 하나였다. 심지어 [[토마스 만]]의 사위였던 지휘자 클라우스 프링스하임도 일본에 망명해 도쿄음악학교 교수로 일하며 활동을 이어갔고, 다른 유대인 음악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들도 전황 악화와 [[국수주의]] 노선의 강화로 인해 결국 차례로 활동 금지를 당했다.] 결국 로젠스톡은 1944년 2월 이후로 아예 모든 공적 음악 활동을 금지당했고, 타카다 신이치에게 직책을 넘겨준 뒤 여타 일본 내 비적성국 출신 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나가노|나가노 현]] 카루이자와의 허름한 가옥에서 사실상 유폐 생활을 해야 했다(다만 서류상 직책은 유지되었다). 전세가 [[미드웨이 해전]] 이후로 패색이 점차 짙어지자 단원들에게도 징집 명령이 내려지기 시작했고, [[도쿄 대공습]] 같이 본토에 [[미군]] 폭격기들의 대규모 폭격으로 인해 악기와 악보가 소실되는 등 활동이 심하게 위축되기 시작했다. 결국 1945년 6월에 [[루트비히 판 베토벤|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베토벤)|9번 교향곡]]을 연주한 후 활동 정지 상태가 되었고, 단원들은 대부분 [[군대]]나 군수 공장 등에 징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